범인이 아닌 피해자에서 시작하는 수사
강력 사건이 벌어지면 사람들의 시선은 곧장 범인에게 쏠린다. 그러나 노련한 프로파일러가 사건 파일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파고드는 대상은 도주한 범인이 아니라, 남겨진 피해자분의 삶이다. 놀랍게도 범인의 정체를 가리키는 단서의 절반 이상이 피해자분의 마지막 하루 안에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문을 열어 주었는지, 무엇이 평소와 달랐는지가 곧 범인의 윤곽이 된다. 이 글은 피해자를 읽어 범인을 찾아내는 수사 기법, 즉 ‘피해자학’의 논리를 범죄 심리의 관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간다. 많은 사람들은 프로파일링이라고 하면 범인의 성격을 맞추는 극적인 장면을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프로파일링의 절반은 피해자분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피해자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를 모르면 범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학이란 무엇인가
피해자학은 단순히 피해자분이 누구였는지를 기록하는 학문이 아니다. 피해자분의 삶을 거꾸로 되짚어 그를 노린 사람의 정체를 추론하는 능동적인 수사 기법이다. 모든 범죄에는 ‘왜 하필 이 사람이었는가’라는 질문이 숨어 있다. 낯선 사람이라도 아무나 고르지 않는다.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사람, 혹은 오래 지켜본 사람이 범행에 이른다. 그래서 피해자분의 인간관계와 동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용의자 명단이 된다. 프로파일러는 죽음이 아니라 삶을 읽는다. 이 접근이 강력한 이유는 분명하다. 범인은 사라졌지만, 피해자분이 살아온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흔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통화 한 통, 스쳐 간 약속, 습관처럼 반복된 동선이 모여 범인이 접근할 수 있었던 좁은 통로를 그려낸다. 수사가 헤맬 때, 답은 늘 피해자분의 일상 안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위험 수준으로 읽는 두 개의 저울
프로파일러는 피해자분을 위험 수준으로 분류한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낯선 이와 접촉이 적은 사람은 ‘낮은 위험군’이다. 이런 피해자분이 표적이 되었다면, 범인은 상당한 계획성과 접근 능력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생활이 불규칙하고 낯선 이와 자주 마주치는 환경이라면 위험 수준은 높아진다. 여기에 더해 범인이 감수한 위험, 즉 대낮이나 사람 많은 곳에서의 범행 여부도 함께 저울질한다. 이 두 저울을 겹쳐 보면 수사망은 수천 명에서 수십 명으로 좁혀진다. 예를 들어 규칙적이고 안전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 자신의 집 안에서 피해를 입었다면, 이는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오래 준비한 접근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위험 수준이라는 개념은 피해자분을 탓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범인이 어떤 능력과 조건을 갖춘 사람인지를 역으로 추정하기 위한 냉정한 분석 도구다.
마지막 24시간의 복원
수사의 핵심은 피해자분의 마지막 24시간을 분 단위로 복원하는 일이다. 프로파일러는 통화 기록과 카드 내역, 이동 경로,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인다. 아침 통화, 점심 약속, 갑자기 취소된 저녁 일정이 모두 단서가 된다. 특히 ‘평소와 다른 단 하나의 변화’가 결정적이다. 늘 잠그던 문을 열어 둔 날, 만나지 않던 사람을 만난 날, 그 어긋남의 지점에 범인이 서 있는 경우가 많다. 프로파일러는 그 빈틈을 찾기 위해 피해자분의 하루를 자신의 하루처럼 살아 본다. 이 복원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복되던 패턴’과 ‘그날의 예외’를 구분하는 일이다. 사람은 대부분 습관의 동물이다. 늘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고, 같은 길로 다니며, 같은 사람들과 연락한다. 그 익숙한 리듬에서 벗어난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닐 확률이 높다. 프로파일러는 바로 그 예외의 순간에 누가 개입했는지를 끈질기게 되묻는다.
”범인을 알고 싶으면, 먼저 피해자를 보라”
오랜 경력의 프로파일러들은 신참에게 늘 같은 말을 반복한다. “범인을 알고 싶으면, 먼저 피해자를 보십시오.” 처음에 신참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범인을 쫓는데 왜 피해자를 보라는 것일까. 그러나 사건을 거듭할수록 그들은 피해자분의 삶이 곧 범인의 지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피해자분은 말이 없지만, 그 마지막 하루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증언한다. 문제는 그 증언을 누가 읽어낼 수 있느냐다.
피해자의 삶이 말하는 네 가지
피해자분의 삶은 범인에 대해 네 가지를 말해 준다. 첫째는 접근성이다. 누가 피해자분에게 다가갈 수 있었는가가 용의선상의 출발점이다. 둘째는 신뢰다. 문을 열어 주고 경계를 풀 만큼 가까운 사람은 제한되어 있다. 셋째는 동선이다. 매일 지나던 길목은 범인이 그를 관찰한 무대였다. 마지막은 변화다. 최근 삶에 끼어든 새로운 인물이나 갈등은 가장 강력한 신호다. 이 네 가지를 겹치면, 아무 관계없어 보이던 이름 하나가 유독 자주 떠오른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이름이 대개 수사 초기에 이미 조사 대상 명단 어딘가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뚜렷한 동기나 물증이 없어 뒤로 밀려나 있었을 뿐이다. 피해자학은 바로 그 밀려나 있던 이름을 다시 앞으로 끌어올린다. 삶의 결을 읽는 작업이 없었다면, 그 사람은 끝내 용의선상 밖에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연인가, 표적인가
피해자분이 우연히 선택되었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표적이었는가는 수사의 방향을 완전히 갈라놓는다. 우연한 피해라면 범인은 기회를 노린 낯선 사람일 확률이 높고, 수사는 지역과 시간대로 넓게 퍼진다. 반면 처음부터 지목된 피해라면 범인은 피해자분을 알고 이유를 가진 사람이며, 수사는 곧바로 주변 인물로 좁혀진다. 그래서 프로파일러가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 왜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사람이었는가. 이 하나의 물음이 수사를 엉뚱한 방향에서 구해 낸다. 표적된 피해임을 알려주는 신호는 의외로 조용하다. 평소와 다른 시간에 걸려 온 전화, 갑자기 늘어난 특정 인물과의 접촉, 최근 생긴 금전이나 감정의 갈등이 그것이다. 이런 신호를 사소하다고 흘려보내면, 수사는 낯선 침입자를 쫓느라 몇 년을 허비하게 된다. 반대로 이 신호를 붙잡으면, 범인은 이미 피해자분의 삶 안에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복원된 하루가 가리킨 얼굴
한 사건에서 복원된 피해자분의 마지막 하루를 보자. 오전엔 늘 그렇듯 출근길 카페에 들렀고, 점심엔 오래 알던 지인과 짧게 통화했다. 오후 늦게 평소 하지 않던 은행 업무를 급히 처리했고, 저녁 약속 하나가 문자 한 통으로 갑자기 취소됐다. 밤이 되자 현관 잠금장치가 안쪽에서 열려 있었다. 낯선 이에게는 결코 열어 주지 않던 문이었다. 이 사소한 어긋남들을 이으니, 그날 곁에 있던 사람의 윤곽이 또렷해졌다. 낯선 침입자가 아니라, 잘 아는 얼굴이었다.
무너진 알리바이
담당 형사는 취소된 저녁 약속에 주목했다. 약속을 취소한 사람은 피해자분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런데 그는 취소 문자를 보낸 시각에 다른 곳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형사가 통신 기록을 대조하자 결정적 사실이 드러났다. “이 문자는 피해자분의 집 근처에서 발송됐습니다.” 알리바이는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피해자분의 마지막 하루가 침묵 속에서 범인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침묵을 읽어낸 것이 바로 피해자학이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교훈은 단순하다. 알리바이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삶의 궤적으로 검증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통신 기록과 이동 경로, 피해자분의 평소 습관은 쉽게 조작되지 않는다. 프로파일러는 진술의 빈틈이 아니라, 피해자분의 하루와 용의자의 동선이 겹치는 지점을 파고든다. 그 겹침이 드러나는 순간, 아무리 정교한 알리바이도 힘을 잃는다.
통계가 말하는 ‘아는 사이’의 무게
통계는 피해자학이 왜 강력한지를 보여준다. 많은 강력 범죄에서 가해자는 피해자분과 이미 아는 사이였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보다, 가족이나 지인, 최근 얽힌 인물에 의한 경우가 훨씬 많다. 그래서 낯선 침입자만 쫓는 수사는 자주 길을 잃는다. 프로파일러가 피해자분의 반경 안에서 먼저 답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 24시간, 그 짧은 시간 안에 범인은 반드시 한 번은 스쳐 지나간다. 문제는 우리가 그 스침을 알아보느냐다.
피해자를 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일
이 모든 추론을 이끄는 사람은 행동 분석관, 곧 프로파일러다. 그의 책상에는 범인의 사진이 아니라 피해자분의 일상이 붙어 있다. 그는 피해자분이 좋아하던 것, 두려워하던 것, 최근 달라진 것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피해자분을 한 인간으로 온전히 이해하려 애쓴다. 그 이해가 깊어질수록 범인이 어떤 사람인지가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그에게 피해자분은 사건 번호가 아니라, 끝까지 목소리를 들어야 할 증인이다. 이 태도는 단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용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피해자분을 깊이 이해할수록 범인의 윤곽이 더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프로파일러는 냉정한 분석가인 동시에, 한 사람의 삶을 끝까지 존중하는 사람이다.
마치며 — 가장 정직한 증언
우리는 사건을 이야기할 때 늘 범인에게만 시선을 둔다. 그러나 진실로 가는 길은 종종 피해자분에게서 시작된다. 그분들의 마지막 하루는 아무 말이 없지만, 가장 정직한 증언을 남긴다. 누구를 믿었고, 어디를 지났으며, 무엇이 달라졌는지가 곧 범인의 얼굴이 된다. 피해자분을 숫자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일, 그것이 프로파일링의 시작이자 마지막 예의다. 그리고 그 태도야말로, 진실을 향해 조용히 말을 거는 하루를 끝까지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피해자를 온전히 바라볼 때, 비로소 얼굴 없는 범인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피해자학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수사 기법 하나가 아니다. 사라진 한 사람의 하루를 끝까지 존중하며 들여다보는 그 태도가,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길이라는 사실이다.